10월 4일, 일요일 밤 아홉시가 넘자 내과병동의 복도에도 불빛이 하나둘 낮추어졌다.
수정은 간호원실 책상에 앉아 환자기록부를 정리하고있었다.
밤번을 선지도 어느덧 석달째였다.
간호원실 창밖으로는 병원앞 큰길의 가로등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저 불빛아래 어딘가에서도 지금 누군가는 같은 방송을 켜놓고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펜끝이 자꾸 멈추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3주동안 이어진 《봉누도2》의 마지막 콘서트가 오늘밤 열린다는것을 수정은 알고있었다.
9월 14일 저녁, 그 거리의 문이 처음 열리던 날을 수정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있었다.
그날 마침 낮번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던 수정은 개막날 저녁에만 동시시청자가 10만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방송을 켰던것이다.
그뒤로 수정은 근무가 없는 날이면 그 거리의 하루를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낮번이였다면 오늘도 집에서 편안히 보았을것이다.
수정은 머리를 흔들고 다시 기록부에 눈을 박았다.
《수정동무,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선임간호원 명숙이 따끈한 보리차 두잔을 들고 들어왔다.
《아니예요. 그저…》
《그저 뭐?》
명숙이 보리차 한잔을 수정의 앞에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수정은 하는수없이 사정을 털어놓았다.
지난 3주동안 틈만 나면 가상의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의 하루를 지켜보았다는것, 병원장이 있고 경찰이 있고 들판의 아줌마가 있는 그 거리가 오늘밤으로 막을 내린다는것을.
명숙은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한참 웃더니 손전화기를 꺼내보였다.
《실은 나도 우리 딸애한테서 그 거리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들었다오. 거기 병원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 병원보다 더 바쁘다나.》
두사람은 마주보고 소리없이 웃었다.
《우리 딸애는 오늘밤만은 끝까지 보겠다고 아침부터 숙제를 다 해놓았다던데.》
명숙의 말에 수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쉬는 시간에 같이 보자구. 대신 그때까지 할 일은 다 해놓고.》
《네!》
아홉시 순회를 돌 때였다.
6호실에 들어서니 맨 안쪽 침대의 이불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여나오고있었다.
수정이 이불자락을 살며시 들추자 녀학생 환자가 손전화기를 품에 안은채 화들짝 놀랐다.
《간호원선생님, 오늘이 마지막 콘서트라서요… 조금만 보면 안될가요?》
수정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바로 조금전까지 자기도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기때문이다.
《십분만이야. 그리고 래일 아침에 무슨 노래가 나왔는지 나한테도 이야기해줘야 해.》
녀학생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밤번이 늘 그렇듯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홉시반이 조금 지나 7호실의 호출종이 울렸다.
열이 오른 로인환자가 숨이 가쁘다고 하였다.
수정은 명숙과 함께 병실로 달려갔다.
체온을 재고 당직의사를 부르고 약을 챙기는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수정은 환자의 손을 꼭 잡고 가쁜 숨결을 하나하나 세였다.
창밖의 어둠속에서 시간은 소리없이 흘러가고있었지만 그 순간만은 콘서트도 노래도 수정의 머리속에 없었다.
약을 쓰고 한시간이 지나서야 환자의 숨결이 차츰 고르게 되였다.
명숙이 다른 병실을 돌러 나간 뒤에도 수정은 한동안 환자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윽고 로인이 눈을 뜨고 수정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간호원동무, 이제 나는 괜찮소. 어서 가서 좀 쉬오.》
수정은 담요를 다시 여며드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복도의 벽시계는 벌써 열한시를 넘어서고있었다.
간호원실로 돌아오며 수정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였다.
(이제는 다 끝났겠지.)
콘서트가 오후 9시 36분에 시작되였다는것은 알고있었다.
벌써 한시간반이 지난것이다.
그런데 간호원실 문을 열자 명숙이 손전화기를 책상우에 세워놓고 손짓을 하였다.
《어서 와요. 아직 하고있어. 이제 거의 마지막인가봐.》
수정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작은 화면속에서는 가상의 거리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스무팀이 차례로 오른 무대도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있었다.
이윽고 마지막곡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Break Out》, 3주전 이 거리의 문을 열던 그 오프닝곡이였다.
노래를 부르는 이는 리제동지께서 맡으신 인물 《야루》이였다.
수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지난 3주동안의 장면들이 노래와 함께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첫날 거리에 들어서던 사람들, 병원의 분주한 아침, 들판의 웃음소리, 떠들썩하던 재판…
노래가 끝나자 화면 한쪽으로 축하와 작별의 글들이 끝없이 흘러갔다.
수정은 문득 6호실의 녀학생이 생각났다.
살며시 복도로 나가 6호실을 들여다보니 이불속의 불빛은 어느새 꺼져있었다.
녀학생은 손전화기를 베개옆에 놓아둔채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래일 아침에 꼭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해야지.)
수정이 간호원실로 돌아오자 명숙이 식은 보리차를 한모금 마시며 어디 갔다 왔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6호실 애가 콘서트를 보다가 잠들었어요.》
《그 애도 오늘밤은 좋은 꿈을 꾸겠구만.》
명숙이 화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덧붙였다.
《이상하지? 그 사람들을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데 꼭 정든 이웃을 보내는것같네.》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숙언니, 고마와요. 같이 봐주셔서.》
《고맙긴. 덕분에 나도 딸애한테 할 이야기가 생겼는데.》
그때 복도 끝에서 다시 호출종이 울렸다.
두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리차는 어느새 식어있었지만 수정의 가슴은 따뜻하였다.
먼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지만 수정에게는 이 밤이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를 달려가는 수정의 귀가에는 아직도 그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맴돌고있었다.
남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