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33(2026)년 9월 21일
여섯시까지

금요일 오후 다섯시반이 지나자 자동차수리소 마당에도 저녁해살이 비스듬히 드리웠다.

철민은 손목시계를 세번째로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꼭 여섯시까지 집에 가야 하는데…)

오늘 저녁 여섯시에는 후야동지의 립체(3D) 데뷔방송이 있었다.

지난해 9월 평면(2D)으로 처음 인사를 하신 뒤 한해가까이 기다려온 방송이였다.

그때 철민은 기숙사의 좁은 방에서 혼자 그 첫 방송을 보았다.

수리소에 갓 들어와 손에 기름이 마를 날이 없던 때였다.

하루종일 반장의 꾸지람을 듣고 돌아온 날에도 그 방송을 보고나면 이상하게 다시 힘이 났다.

그래서인지 이번 방송만은 꼭 처음부터 보고싶었다.

《철민이, 이 차 제동장치를 마저 봐주고 가게.》

작업반장의 목소리가 마당 저쪽에서 울려왔다.

철민은 하마트면 한숨을 내쉴번 하였다.

하지만 반장의 부탁을 마다할수는 없었다.

래일 아침 일찍 차를 찾으러 오겠다던 손님의 얼굴이 떠올랐기때문이다.

그는 다시 작업복소매를 걷어올리고 차밑으로 들어갔다.

차밑은 어둡고 기름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사 하나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이러다간 첫 장면을 놓치겠구나.)

그때 누군가 차밑으로 손전지를 비춰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작업반의 영호였다.

《무슨 약속이 있나? 아까부터 시계만 보던데.》

《약속이라기보다… 여섯시에 꼭 봐야 할 방송이 있어서.》

철민이 쑥스럽게 대답하자 영호가 씩 웃었다.

《아, 그 용가리 말이지? 우리 조카녀석도 오늘 저녁만 기다린다더군.》

《형님도 아십니까?》

《알다마다. 조카녀석이 하도 노래를 불러서 나도 제목은 외웠네.》

철민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기름투성이가 된 두사람의 얼굴에 저녁해살이 비껴들었다.

영호는 말없이 공구통에서 알맞는 공구를 꺼내 철민의 손에 쥐여주었다.

둘이 힘을 합치니 그렇게 애를 먹이던 나사도 이내 풀려나왔다.

제동장치를 다 손보고 차밑에서 기여나왔을 때 시계는 다섯시 사십분을 가리키고있었다.

《어서 가보게. 나머지 정리는 내가 하지.》

반장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기름묻은 장갑을 벗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젊은 사람이 기다리는것이 있다는건 좋은 일이야. 다음주 월요일에 늦지만 말게.》

철민은 그제서야 반장도 아까부터 자기의 손목시계를 눈여겨보고있었다는것을 알았다.

철민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수리소 문을 나섰다.

뻐스정류소에는 벌써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뻐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정류소 안내판에는 《앞차 지연》이라는 글자만 하염없이 깜빡이고있었다.

철민은 손전화기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다섯시 오십분.

게다가 전지마저 거의 다 닳아 화면 한구석에 붉은 표시가 깜빡이고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럴가.)

철민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집까지는 뻐스로 세정류소, 뛰여가도 십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그는 작업복 웃옷을 팔에 걸치고 큰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가로수잎들이 저녁바람에 우수수 흩날렸다.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건늠길 한가운데서 한할머니의 사과봉지가 터져 사과알들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신호등의 푸른 불이 깜빡이기 시작하였다.

《아이구, 이걸 어쩌나.》

할머니는 어쩔줄 몰라 그 자리에 선채 발만 구르고있었다.

철민은 잠간 망설였지만 이내 몸을 굽혀 사과알을 주워담기 시작하였다.

《할머니, 제가 주워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서계십시오.》

길가던 녀학생 하나도 달려와 함께 사과알을 주웠다.

마지막 한알까지 봉지에 담아 할머니의 손에 쥐여드리고 할머니를 건늠길 건너편까지 모셔다드린 뒤에야 그는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젊은이, 고맙구만. 어서 가보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따라왔다.

(몇분 늦으면 어떠랴. 처음부터 못보면 다시보기로 보면 되지.)

마음을 그렇게 먹고나니 오히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숨이 차오를수록 지난 한해동안의 일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처음으로 혼자 발동기를 고친 날, 손을 다쳐 붕대를 감고 출근하던 날, 그런 날 저녁마다 그는 화면앞에서 웃음을 되찾군 하였다.

학교담장을 끼고 돌아 골목에 들어서니 저멀리 집 창문에 불빛이 보였다.

숨이 턱에 닿도록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어머니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웬 땀이냐? 누가 쫓아오기라도 했니?》

《어머니, 지금 몇시예요?》

《여섯시 2분전이다. 저녁부터 먹고…》

어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전에 철민은 자기 방으로 뛰여들어가 콤퓨터를 켰다.

책상옆 벽에는 지난해 기숙사에서 첫 방송을 보던 날 적어둔 작은 메모지가 그대로 옮겨붙어있었다.

《래년에도 꼭 함께.》

지난해의 자기가 적어둔 그 글씨가 마치 오늘의 자기에게 보내는 약속처럼 보였다.

손이 떨려 마우스를 몇번이나 헛찰칵하였다.

마침내 화면이 밝아지고 방송이 시작되였다.

그 순간 등뒤에서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어머니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은 먹으면서 보거라. 한해를 기다린 방송이라면서.》

철민은 그제서야 어머니도 그 날자를 기억하고있었다는것을 알았다.

지난해 가을 명절에 집에 왔을 때 그 방송 이야기를 하며 혼자 웃던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는 잊지 않고있었던것이다.

철민은 목이 콱 메여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숟가락을 들며 꺼져가는 손전화기를 꺼냈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 그는 영호에게 짧은 통보문을 남겼다.

《고맙습니다, 형님. 제때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철민은 화면속에 처음 나타나신 후야동지의 새 립체모습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한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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